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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징 순국선열


한징 순국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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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을 지켜낸 언어학자◎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 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했던 언어학자 한징 선생은 1886년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 우리말과 글을 지킨 독립운동가다. 어려서 한학과 국학을 공부한 선생은 15세에 사서삼경에 정통한 수재로 우리말과 글 연구에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1922년부터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민족 언론 창달에 노력하였고, 1927년에는 계명구락부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가 편찬이 중단되자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했다. 이후 1931년 조선어학회가 조직되자 회원으로 가입하고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의 제정과 우리말사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표준어가 정해져 있지 않아 각 도의 사투리가 난무하여 합리적인 언어생활을 위해 표준어를 정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대의 아래,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표준어 사정작업에 선생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가며 민족어 3대 규범집「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국어사전 편찬은 ‘국권 회복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진행하던 이 사업은 자금 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1936년 조선어학회로 인계되어 추진되었고 일제는 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어학회 인사들을 주시하였다. 그러다 결국 조선어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선생도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다 1944년 2월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선생께서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우리말 사전은 순국하신 지 3년 만인 1947년이 돼서야 ‘조선말큰사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정부는 한글운동으로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한 선생의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397호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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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관리 담당 : 선양팀 042-820-7063 최종수정일 : 201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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